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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급 트레이딩 시스템을 만들다 접었다

11,000줄짜리 트레이딩 대시보드를 완성 직전에 덮었다. 이유는 단 하나 — 내 머릿속 감각을 AI가 이해하지 못했다. 코드는 되는데, 판단이 안 됐다.

2025년 12월 말, 11,409줄짜리 트레이딩 대시보드를 완성했다. 그리고 폴더를 덮었다. 이유는 단 하나다.

내 머릿속 지식을 AI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을 만들었나

한 화면에 모든 게 들어가는 블룸버그 터미널 클론이었다. 이름은 QuantFlow Pro.

  • 대시보드: 실시간 자산 배분, 섹터 익스포저, 일일 VaR
  • 팩터 뷰: 모멘텀·퀄리티·밸류 3팩터 복합 스코어
  • 매크로 뷰: 레짐 탐지(Risk-on / Risk-off), 섹터 로테이션
  • 저널: 트레이드 로그, 진입 이유, 사후 리뷰
  • 투자 철학 뷰: Kelly Criterion 사이징, ATR 트레일링 스톱

CSS 변수로 테마 통일, Chart.js 시각화, Inter + JetBrains Mono 타이포그래피. UI만 보면 기관용 제품 수준까지 왔다.

문제는 “틀"이 아니었다

UI는 잘 나왔다. 데이터 파이프라인도 작동했다. 계산도 돌았다. 전부 AI랑 같이 만들었는데, 지금까지는 순조로웠다.

막혔던 곳은 실제 판단 로직이었다.

감각을 코드로 못 옮긴다

내가 3년 만에 시장에서 1억을 만든 방식은 식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차트를 볼 때, 수급을 볼 때, 공시를 볼 때, 하나하나에 “이건 진짜고 이건 가짜다"라는 감각이 있었다. 이유를 설명하라면 다섯 문단은 쓸 수 있지만, 그 문단을 다 써도 **실전에서 내가 쓰는 기준의 30%**도 안 잡힌다.

AI한테 이걸 시켰다.

“거래량이 터지는데 가격이 안 따라가면 경계해야 돼”

AI는 이걸 코드로 옮긴다:

if volume_surge > 2.0 and price_change < 0.01:
    flag = "warning"

이게 아니다. “거래량이 터지는데"는 절대치가 아니다. 그 종목의 평소 패턴, 그날의 시장 분위기, 섹터 흐름, 거시 레짐에 따라 다르다. “가격이 안 따라가면"도 마찬가지다. 시간대마다, 호가창 상태마다, 의미가 다르다.

AI한테 아무리 설명해도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의 경계를 못 그어냈다. 내가 쓰는 말이 너무 느슨했고, 그 느슨함 안에 핵심이 있었다.

모호성이 자산이었다

AI와 나의 일반적인 협업에서는 명료성이 자산이다. 내가 명확하게 지시할수록 AI는 잘 만든다.

그런데 트레이딩에서는 반대였다. 모호성이 edge였다. “이럴 땐 보통 피하는데, 오늘은 괜찮을 것 같아"라는 그 ‘보통’과 ‘오늘’의 구분을 나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게 몇 년치 감각이 응축된 한 줄이다.

AI는 모호한 걸 명료하게 만들어서 돌려준다. 그런데 명료해지는 순간, 그건 내가 아는 시장이 아니다. 다른 누군가가 쓸 수 있는 일반화된 규칙이 된다. 그건 이미 시장에 있다.

내가 쓰면 되잖아?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럼 시스템은 반쯤 놓고, 최종 판단은 내가 하면 되지.” 실제로 해봤다. 안 됐다.

대시보드가 붙어 있으니 오히려 감각이 둔해졌다. 숫자를 보니 숫자로 판단하게 됐다. 그런데 내 진짜 감각은 숫자 바깥에 있었다. 도구가 사용자를 바꾸는 효과를 내 감각 영역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딜레마가 생겼다:

  • AI한테 맡기면 내 감각이 안 옮겨짐
  • 내가 하면 도구가 감각을 방해함

결국 도구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이었다.

AI-native의 한계

블로그는 AI랑 둘이서 30분에 만들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 블로그의 모든 판단은 명료화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섹션은 이런 역할, 이 색깔은 이런 느낌.” AI는 명료화된 요구를 받아서 구현한다.

트레이딩은 반대였다. 판단이 명료화되는 순간 edge가 사라지는 영역이다. AI-native로 만들 수 없는 게 있었다. 이걸 인정하는 데 11,000줄이 걸렸다.

그 다음

이 실패에서 나온 질문 하나:

“나처럼 감각으로 이기는 사람이 분명 있을 텐데, 그 사람들의 감각이 진짜였는지 어떻게 증명하지?”

이게 그 다음 프로젝트의 씨앗이었다. 감각은 옮길 수 없다. 그런데 결과는 옮길 수 있다. 결과를 검증하는 인프라만 있으면, 감각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있다.

감각을 코드로 옮기려다 실패했으니, 감각의 존재 증명을 자동화하기로 했다. 방향이 완전히 뒤집혔다. (이쪽 작업은 아직 공개 전이다.)

남긴 교훈

도구는 모호성을 명료하게 만든다. 그런데 어떤 영역에서는 모호성 자체가 자산이다.

이걸 구분 못 하면, AI-native 시대에도 계속 헛발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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